그들이 사는 세상
감독에게 있어서 새 작품을 만난다는 건,
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두려운 일이다.
그러나 그 두려움의 실체를 찾아내 직면하지 않으면,
작품은 시작부터 실패다.
왜 이작품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지,
내가 찍어내는 캐릭터들은 어떤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,
왜 외로운지, 왜 깊은 잠을 못자고 설치는지,
사랑 얘길할 땐 캐릭터들의 성적취향까지도 고민해야 한다.
시청자들이야 별 볼일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
적어도 작품을 만드는 우리에게 작품 속 캐릭터는
때론 나 자신이거나, 내 형제, 내 친구,
내 주변 누군가와 다름없기 때문이다.
그리고 고민이 끝날 즘 비로소 우린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처럼
새로운 작품에 온몸을 던질 준비를 마치게 된다.
감독이 작품속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자만할 때
작품은 본궤도를 잃고 방황하게 된다.
어쩌면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.
내 앞의 상대를 다 안다고 생각한 그 순간 뒤통술 맞는 일이 일어나고 만다.
지금처럼.
누나는 엄마가 단 한순간도 이해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한다.
그러나,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다.
아니,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. 다만 내가 바라는 건,
그녀가 내 곁에 아주 오래오래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것.
이상하다.
'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'
이 말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내게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였는데,
절대 이해할 수 없는 준영일 안고 있는 지금은
그 말이 참 매력적이란 생각이 든다.
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린 더 얘기할 수 있고,
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린 지금 몸 안의 온 감각을 곤두세워야만 한다.
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건 아니구나.
또 하나 배워간다.